“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수 24:15). 나는 이 선포가 많은 가정의 벽에 걸려 있는 것을 보아왔다. 많은 젊은이들이 가정을 갖기 전에 이 선포를 한다. 결혼한지 얼마가 지난 가정도 좀더 현실적이긴 하지만 “오직 나의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어느 정도는.”이라고 선포할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 선포에 포함되어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기에 여호수아의 선포를 하기란 더욱더 어려워진다. 하지만 이 것은 그가 청년 때에 한 것이 아니라 여호수아가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이런 선포를 한 것이다. 그는 그 시대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패배했던 것과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체험의 해가 뒤로 가면서, 여호수아는 확신을 갖고 선포할 수 있었다. “오직 나와 나의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여호수아는 이 선포에 얼마나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는가를 알고 있었다. 그는 40년 간 모세 아래에서 광야에 있으며 섬기는 동안 많은 어려운 공과를 배웠으며, 따라서 이스라엘 민족을 좋은 땅으로 이끌게 된 것이다.
모든 사람들은 좋은 땅을 정복하기 위하여 전쟁터로 이스라엘 군대를 이끌고 간 여호수아에 대한 이야기 듣기를 좋아하지만, 이를 위하여 여호수아를 예비토록 한 수년 간의 공과에 대하여 주목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여호수아가 행한 것처럼 주님을 위하여 싸우기를 갈망하고 여호수아처럼 주님을 섬길 것을 선포한다면, 우리는 여호수아가 통과했던 것을 통과해야 하며 그가 배운 공과를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여호수아의 준비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 여호수아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다. 그 시점에, 그는 하나님의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이스라엘을 통치하기 위한 그의 준비는 세 단계로 되어 있었다. 헌신과 학습과 체현이었다. 이 단계들은 우리에게 주님을 따르고 섬기는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준다.
하나님은,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서 표현하도록 인간을 창조하셨다. 인간의 진실한 잠재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로서 거듭날 때만 실현될 수 있다. 일단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고, 예수를 사랑하게 될 때 높은 수준의 생명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분께 온전히 드려진바 된 사람들 가운데, 가장 높은 성취가 하나님의 갈망을 따라 이 땅에서 하고자 하시는 것을 위하여 서기로 작정한 자들에게 있을 것이다. 주님을 섬기는 것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이런 기본적인 것을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느낌에 낙심하고 울부짖는다. 하지만 분명코 주님은 그분을 믿은 자들과 함께 하신다. 실제로, 주님은 자신을 그분께 헌신하고 그분을 섬기기를 갈망하게 하시는 분이다. 만일 우리가 여호수아가 섬겼던 것처럼 섬기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여호수아가 배웠던 공과를 배우도록 주님과 협력해야 한다.
독수리 날개에 업힘
출애굽기 19장 4절에거 주님은 모세에게, “내가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자손들이 그들이 애굽에서 탈출하는 것을 막는 그 어떤 장애나 방해들을 극복하기를 요구하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단지 그들을 그분의 등에 없고 하늘로 날라가셨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에 있음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다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올리셨기 때문이다 (엡 2:6). 우리는 이 고봉을 등정하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독수리 날개에 업히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가 있는 곳으로부터 이끌어내어 하늘에 속한 영역으로 옮기셨으며, 이로써 우리의 촛점과 누림이 그리스도 그분 자신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도록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우리의 달란트를 축복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성공적이 되도록 하려고 이곳으로 옮기시지 않았다. 그분의 목적은 우리가 하늘에 속한 영역으로 옮겨져서 그분 앞으로 오도록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가에 대하여 염려할 필요가 전혀 없다. 워치만니 형제가 돌아가실 때, 그의 사역을 통하여 일으켜진 중국 내 교회들 가운데 60,000 곳 이상에서 집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36년이 지난 오늘날, 어떤 특별한 실행이나 방법에 초점을 두지 않고 단순히 말씀 가운데 실제화된 진리에 따라 일으켜진 집회가 중국 내에 적어도 6백만 곳 이상이 있다. 워치만니 형제가 양육한 이 교회는 무엇이었는가? 우리는 어떤 특별한 문제도 지적할 수 없다. 하나님은 다만 우리를 그분의 날개에 품어 신성하고 비밀스러우며 하늘에 속한 영역으로 옮겨 그리스도 그분 자신께만 중심을 둘 수 있기를 갈망하실 뿐이다. 하나님의 역사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그분께 달려 있다.
그분의 소유, 제사장 직분과 증거
주님은 모세에게 사람들의 책무는 단지 그분께 중점을 두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왜 그분이 사람들이 그분의 음성을 따르고 그분의 약속을 지킨다면, 그들은 이 땅에서 그분의 소유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유이다 (출 19:5).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시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분께 매우 특별한 존재가 된다. 모든 사람들 가운데, 우리는 그분의 특별한 소유이다 (벧전 2:9).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하나님께 향하여 서기 시작한다. 우리가 그분께 우리 자신을 드리면 드릴 수록, 더욱더 우리의 삶과 섬김은 이 소유의 미를 표현하게 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이 땅에 하나님의 단체적인 간증으로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된 이스라엘의 중요성이다.
하나님의 소유된 사람들은 또한 그분에게 제사장 왕국이 된다 (출 19:6). 구약에서 하나님은 한 무리의 제사장을 얻으셨는데, 그들은 함께 제사장 직분의 기능을 행했다. 신약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얻으셨으며 우리는 함께 교회 생활을 통하여 그분의 제사장으로서 그분을 섬기게 된다 (벧전 2:9, 계 1:6).
출애굽기 19장 6절에서, 하나님은 또한 모세에게 이스라엘이 그분의 거룩한 나라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나라가 된다는 것은 증거의 말씀이다. 예를 들어, 중국의 간증은 2008년 올림픽 기간 동안 강화되었다. 사 년 동안, 중국은 1920년의 아편 전쟁 동안의 경험으로 인하여 나라들 가운데에서 그 머리를 들어올릴 수 없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중국이 받은 금메달 덕분에 세계 무대에서 그 간증을 어느 정도 다시 구축할 수 있었다. 다시 한번, 중국의 국민들이 중국인인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다.
이 땅의 나라들은 그들 자신들만을 증거하려 한다. 하나님은 증거가 필요한가? 어떤 이들은 아마도 사람들이 구원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 한 것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거룩하시기 때문에 거룩한 나라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간증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간증이 되게 하시려고 우리를 일으키셨다. 만일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모이며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 것을 본다면 얼마나 좋은 일인가!
하나님의 갈망은 이스라엘이 기이한 소유로서 제사장 왕국으로 거룩한 나라로 여호수아가 그 자신을 주께 드리고 주님만을 섬긴 것과 같이 되는 것이다.
여호수아의 시작
하나님께서 처음 모세를 부르셨을 때, 그분은 아론이 모세와 함께 일하도록 선택하셨다 (출 4:14-15, 7:1). 그러나, 누가 여호수아를 선택하였나?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지 않고 있다. 여호수아는 훌이라 하는 자와 함께 길을 가는 동안 모세에 의하여 선택되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의 이름은 호세아였으며 (민 13:8), 그 뜻은 ‘인도자’ (스트롱 주석 참조)이나, 모세가 이를 여호수아로 바꾸었으며 (민 13:16), 그 의미는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이다 (다비역 참조). 모세는 아마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젊은이, 자네는 인도자가 아닐세. 구원은 여호와께 속한 것일세!” 모세가 여호수아의 이름을 바꾼 것은 아마도 그가 인도자가 될 것으로 지명된 것을 가리킨다. 여호수아가 더 젊고 더 활기차서 전쟁에 합당한 자인 반면에 훌은 좀더 나이가 있고 행정의 책무에 적합한 것 같았다. 훌은 아론과 함께 모세를 도와 참모 직분을 하였으며, 한편으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군대를 지휘하였다 (출 17:8-10). 그가 기록에 나타난 처음부터,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그의 책무를 지명 받았다.
아말렉에 대한 여호수아의 승리
여호수아가 배운 첫 번째 공과는 그 자신에 의한 승리라고 주장하지 못할 커다란 승리를 하면서였다.
우리가 주님을 처음 사랑하고 그분께 우리 자신을 내어 드렸을 때, 종종 우리 자신이 승리한 것을 발견하곤 한다. 내가 처음 주님을 믿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를 믿어야 한다고 말했을 때, 그들은 나에게 동의하고 주를 영접하도록 기도하였을 것이다. 오늘날, 만일 내가 사람들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나에게 자신들을 내버려 두라고 요구할 것이다. 내가 18 살 때, 나는 젊은 여호수아처럼 주님을 사랑했다. 나는 주님께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싸울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 이렇게 말한다. “주님은 내가 싸우기를 원하십니까? 그것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들을 뒤로 물러나게 만드는 그 생각의 과정에 얼마나 뛰어들고 싶은지! 헌신 없이는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길은 아무데도 없다. 군인으로서 우리가 당연하게 가져야 할 태도는 우리가 기꺼이 전투의 최전방에 배치되는 것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안식의 터라는 의미의 이름을 가진(Hitchcock) 르비딤에 장막을 쳤다 (출 17:1). 그들은 광야에 있었지만, 그러나 그들은 안식하였다. 여기서 주님은 내려친 반석으로부터 물을 공급하셨다 (6절). 그리스도는 우리의 내려쳐진 반석이시며, 십자가 위에서 내려쳐지셨다 (고전 10:4). 우리는 안식할는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의 갈증을 해갈하시는 그리스도를 체험하지 않으면 참 안식을 가지지 못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망 안으로 숨어야 하며,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내리쳐지셨으며, 이로써 그분의 사망 안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모든 그분의 풍성함을 공급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 땅에서 물은 갈망의 대상이 되어왔을 것이다. 물이 나왔을 때, 아말렉도 앞으로 나왔다 (출 17:8). 아말렉 사람들은 유목민들이었으며, 아마도 수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수가 백만에 이르렀다. 아말렉 사람들이 이스라엘에게 물이 있다는 것을 보았을 때, 이것은 분명히 그들을 앞으로 나가게 박차를 가했을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을 파괴한다는 것은 너무 어려웠을 테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들의 물의 근원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은 가능할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아말렉은 그 생명의 공급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분리시킬 방안을 찾았다.
아말렉 내부
많은 성경 교사에 따르면, 아말렉은 육신을 나타낸다. 그러나, 이 시점에 아말렉이 나타내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단순히 육신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을 찾는 육신인 것이다. 그들이 탐낸 물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 일단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 시작하고 우리 생활에서 그분의 축복을 경험하면, “아말렉”이 이 공급을 취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심지어 이것은 우리 자신 속에서도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어떤 축복을 받을 때 마침내 우리가 그리스도인에 이르렀다는 것을 느끼기는 쉽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으려고 한다.
여호수아가 아말렉을 패배시킨 후,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출 17:14)고 말씀하셨다. 여호수아는 외적으로는 아말렉 사람들을 패배시켰는지 모르지만, 더 많은 아말렉인들이 여전히 숨어서 도사리며 주께서 그들에게 주신 승리의 영광을 탐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시는 이유가 우리 자신들이라 여기기 쉽다. 겉으로 우리는, “우리는 축복을 받았으며 그것은 주님의 모든 긍휼이다”라고 할지 모르나, 속으로는 그 영의 역사를 대체하려는 어떤 속셈이 이미 있는 것이다. 따라서, 승리자는 주님이시지 우리가 아니라는 것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
기도를 통한 승리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르비딤에서 아말렉인들과 싸우기 위하여 행진하고 있을 때, 모세는 아론하고 훌과 함께 그의 손에 하나님의 지팡이를 잡고 서려고 언덕 꼭대기로 올라갔다 (출 17:9). 모세가 그의 손을 높이 들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승리하였지만, 그가 손을 내릴 때, 아말렉인들이 땅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11 절). 여호수아가 승리하였기에 모세가 찬양하며 그의 손을 올린 것이 아니었다. 또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그들의 용맹함으로 그 날 승리한 것도 아니었다. 이것이 여호수아를 깨우치게 한 첫 번째 공과였다. 그는 주님을 따르기로 자신을 헌신하였고 싸우기 위하여 전쟁터로 용감하게 나갔지만, 실제로 싸우는 사람은 바로 모세였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주님을 섬김에 있어서 배워야 하는 첫 번째 공과이다. 우리는 싸워야 하지만, 우리의 승리는 그리스도의 기도와 믿는 믿는 이들에 대한 그분의 중재에 기인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 말씀에서, 모세가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와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한 전쟁을 싸우는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시는 그분의 믿는 이들 모두를 대표한다 (히 4:14, 7:25, 딤전 2:8).
우리가 섬김에 있어서 다른 것들을 자유로이 시도해봐야 한다는 것에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되지만, 그 어떤 성공도 우리의 노력에 기인한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달란트가 있는 자면 누구나 와서 외적인 성공을 취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그것에 사로잡힌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길을 놓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깨달아야 할 첫 번째 것은 우리가 얼마나 능력이 없고 주님이 얼마나 능력이 있으신가 이다.
모세의 팔이 무거워졌을 때, 아론과 훌은 그의 밑에 돌을 놓아 앉게 하고 그의 팔을 해가 질 때까지 받쳐들었다 (출 17:12). 여호수아의 책무는 아말렉인들의 머리를 치는 것이었지만, 아말렉인들의 목이 여호수아의 칼에 드러내지도록 한 것은 모세의 기도였다. 우리의 체험은 이것과 같다. 내가 젊었을 때, 내가 설교하는 대로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 수백 명이 몇 개월 사이에 구원 받았으며, 60 명 이상이 침례를 받았다. 모세가 그의 팔을 들어 기도할 때, 아말렉인들이 줄을 서서 여호수아와 그의 부하들에게 처형당한 것이다. 하지만, 모세의 팔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할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을 잃고 아말렉의 추적을 받았다. 모세의 팔이 다시 올려졌을 때, 아말렉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칼 아래 다시 한번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것은 우리의 영적 전쟁에 있어 초기의 체험이다. 그 전쟁이 끝났을 때 우리가 승리한 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알지도 못한다. 어떻게 그런 부활이 일어날 수 있었는가? 왜 사람들이 그렇게도 빨리 주께로 보내졌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믿는 이들에 대한 중보가 사람들의 기도 속에서 그들의 팔을 들었기 때문이다.
교회가 복음에 있어서 그런 전투를 싸우는 것처럼 버티고 섬으로써 그 말을 듣는 자들이 영접할 준비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는 자들은 전투에서 승리하는 것이 그들 자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팔을 뻗도록 도와주며 함께 선 자들에 기인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기도하는 믿는 이들과 중보하시는 그리스도인 것이다.
모세의 기도와 여호수아의 칼
성경은 모세의 기도가 그 승리를 확실하게 했음에도 승리를 여호수아에게 돌린다 (출17:13). 이것이 공평한 것인가? 여호수아의 군대는 아말렉인들로부터 퇴각 당하기도 하였고 모세의 기도로 인하여 승리하기도 하였다. 지난 수년 동안, 얼마간의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교회를 세우기 위하여 클리브랜드 지역에 있는 도시로 이주하였다. 그들은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승리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그들의 성공은 오직 교회의 기도, 특히 나이든 자들의 기도로 인한 것이다. 나이든 자들이 그들의 기도를 통하여 얻어진 승리라고 확신하겠지만 여전히 하나님은, “젊은이들이여 승리하라!” 고 말씀하신다. 모세가 없었다면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애굽에서 부터 전 여정 동안 추적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모세의 기도 때문에 여호수아는 아말렉을 패배시켰으며 그 승리를 인정받았다.
이것이 우리가 주님을 섬기기 시작할 때 배워야 하는 첫 번째 공과이다. 모든 영적 축복은 처음에 그리스도와 우리를 위하여 중보하는 자들로부터 온다. 사실에 있어서 전적으로 우리만의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그것은 모세의 기도와 승리를 한 여호수아의 칼 모두에 있는 것이다.
기록된 일깨움
주님은 모세에게 이것을 책에 기록하도록 말씀하셨으며 여호수아가 이 이야기를 들어 기억하도록 하셨다 (출 17:14). 이는 전장에서 승리하고 큰 나팔소리와 함께 전투에서 돌아왔던 여호수아를 위하여 특별히 기록된 것처럼 보인다. 모세는 그리고 난 후 그의 귀에 대고 말했다. “여호수아, 주께서 내가 책에 무언가를 기록하고 네가 읽도록 요구하셨네. 자네는 자네가 승리하였다고 생각하는가? 승리를 하신 분은 하나님일세!” 여호수아는 모세가 그의 팔을 들어 올리지 않았다면 그가 패배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을 것이다. 모세의 기도로 인하여 그의 칼은 날카로워졌다. 우리는 전장에서 필요로 하지만 우리의 경험이나 수고나 열매가 모두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믿는 이들에 대한 중보로 인함이다. 그것이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섬김을 시작하여 심지어 우리의 마지막 날까지 배워야 하는 공과인 것이다.
14 절에서 주님은 또 그분께서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아말렉 족속이 사라졌음에도, 내적으로는 아말렉이 남아 있다. 외적으로 끝났지만, 내적으로는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그것이 속에서 조차도 완전히 가려질 것이다. 여호수아는 이것을 알 필요가 있었다.
1972년 워치만니 형제가 순교한 후, 그가 중국에 세운 교회들에 대하여 전혀 보살핌이 없었으나, 여전히 그 교회들은 성장을 지속하였다. 내가 이것을 볼 때 깨달은 것은, 주님의 축복은 제하고라도 우리의 수고는 정말 쓸모 없는 것이다. 심지어 주께서 축복하신다 해도, 우리는 너무도 쉽사리 그분의 축복을 당연하게 여긴다. 워치만니와 비교한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으나 귀하게 여길만한 가치를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나는 많은 성도들과 많은 교회들을 일으켜 세웠지만, 여전히 그 “책”이 항상 거기서 아말렉은 사라져야 한다고 나에게 속삭인다. 그 때까지 아말렉은 항상 일어날 준비가 되어 있고 주께 속한 존귀를 주장한다.
“주님이 나의 기치”
전투 후에 모세는 제단을 쌓고 이를 여호와 닛시, 즉 “여호와는 나의 기치(旗幟)” 이라고 불렀다 (출 17:15). 우리가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따르기 시작한 그 날부터 우리는 그분만이 우리의 중심이요 자랑이라고 선포하며 그리스도를 우리의 기치로서 높인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유일한 중심이시다. 우리 모두가 그런 기치를 높이 올렸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귀히 여기며 예수를 찬양하는 것 외에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그분의 이름을 찬양할 때, 오늘부터 앞으로 우리 인생은 그리스도 만을 위한 것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호수아는 시작이 매우 좋았다. 그는 주께 헌신되었으며 그 자신을 전투에 내어 드렸다. 그러나, 그의 승리는 그 현장의 뒤에 있는 또 다른 싸움에 좌우되었다. 의롭고 존귀하신 주님을 빼앗아가려는 시도가 항상 있다는 것에 대하여 주의하는 것을 배웠다. 어느 날, 이런 도적과 같은 적이 완전히 소멸 될 것이다. 완전한 승리를 이루는 그 날까지 주님께서는 여호수아의 기치로 남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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